어떠한 구체적 의미도 지니지 않은 악음(樂音)들이 때로 사회적 약속(signal)이나 경험을 통해 구체적 의미나 상황을 연상 시킬 때가 있다. 천상병의 시에 의한 가곡 "귀천"에서의 타악기, 타악기 앙상블을 위한 "반향(Contra)"이 그랬듯이 이 작품에서의 각 악기는 '현세(現世)에 사는 인간 - 가야금', '명계(冥界)에 이르는 상직적 연줄 - 훈', 그리고 이 '두 영들의 부딪힘과 갈등 - 타악기 (트라이앵글과 정)' 을 상징한다. 마디줄 없이 초단위로 기보해 리듬적 요소를 상당 부분 제거한 이 작품 속에는 무력한 인간의 영혼이 고뇌를 거쳐 해칼에 이르러 명계로 돌아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산조가야금의 조율에서 세 개의 현을 반음 낮춘(A♭, E♭,A♭) 가야금과 훈에 의한 명상적인 지속음은 장식음과 가야금의 농현 (훈의 비브라토), 트레몰로와 글리산도, 입김 또는 목소리를 함께 내는 훈의 특수한 연주법, 가야금의 안족을 넘어뜨리는 타악기적 (Barktok Pizz. 와 유사) 효과 등 음향적 요소가 선율적 요소보다 우위에 놓여있는 일종의 명상음악이다.
(백병동 연주 현장의 기록 (1974~2000)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현대 작곡가 시리즈Ⅰ(음반) - 해설: 전상직 (작곡가, 서울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