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동은 가곡에 대하여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작곡가이다. 그는 인성(人聲)을 그가 추구해 오던 ‘현대 정서의 인간화’를 극히 자연스럽게 표출 할 수 있는 좋은 매체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30편에 달하는 그의 가곡은 양식적 변화와 발전을 이루면서 한국 가곡사(歌曲史)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의 가곡을 성격적으로 분류해보면 서정가곡, 민요가곡, 현대가곡으로 나눌 수 있다. 서정가곡으로는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며 쓴 <빠알간 석류>, 경동고등학교 재직 시절 제자의 시에 붙인 <자장가>, <삼매>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가곡들은 기존의 장, 단음계를 벗어나 선법적 요소를 사용하여 소박하면서도 독특한 서정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남도소리의 선법을 연상케 하는 음조직과 엇중모리 장단을 사용한 <남으로 창을 내겠소>와 <강강술래>는 민요가곡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현대가곡은 작곡자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들로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빈약한 올페의 회상>, <화장장에서>, <곡! 신동엽> 등 24편이 있다. 이 곡들은 다양한 현대 성악 기법에 의해 쓰여 졌는데 시의 이미지가 자신의 음악 업으로 재창조되어 그의 특유의 서정성과 어울어져 표현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표출한다. 그 이외에 피아노를 대신하여 세 개의 플롯을 사용한 <아침>, 4개의 타악기를 사용한 <귀천>, 관현악과 연주하는 <물수제비>등은 시의 내용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편성을 달리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장장에서 (정건모)
벽은 무언(無言)의 요설(饒舌)속에서
독용(毒茸)처럼 찌푸린 표정으로
음산한 그의 영역(領域)을 지키고 서 있었다.
때때로 이 벽에선 요령(要領)이 울리고
항쟁(抗爭)의 기치(旗幟)처럼 나풀거리던 서러운 숨결
이파리는 이파리대로
저마다의 아쉬움으로 조그마한 바람결에도 뒤설레이는 것이다.
억겹을 두고 소리없이 흩날리던 낙엽(落葉)들
아, 여기 그들의 마지막 승화(昇華)를 위하여
무수한 풀잎 청태(靑苔)를 사이로 풀벌레만 우는가
오리나무 백화(白樺) 무성한 그림자에 어쩌랴
새들이 짖어귀는다.
지금은 욕(辱)된 삶.
이토록 밀려오는 파멸(破滅)의 절정(絶頂)에서
마음은 사라지는 해일(海溢)
우리도 마침내
저 같은 영겁(永劫)에서
두견(杜鵑)의 울음으로 소생하려는 것일까!
삶이란 이 기름지고 육중한 땅위에
잠시 끼치고 가는 나의 아쉬운 자욱.
통곡하여도 통곡하여도,
시름은
이 고을 허전한
막바지에 메아리되어 가고
서글픈 사연인가
녹슬은 쇠문을
아, 비가 나린다.
(백병동 작품집(음반) 해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