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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근원과 가볍고 따뜻한 미풍의 제피로스, 바람을 타고 오는 봄을 느껴보세요!
Zephyros is both the source of storms and the warm breeze. Experience the rush of spring that comes along with the breeze!
특수효과나 실험적 시도를 자제하고 각 파트의 특성을 잘 살려 색채적 효과를 성공적으로 완성하고 있습니다. (정치용)
<여러분에게 전하는 봄소식(글 : 음악평론가 송주호)>
신화의 클래식 점령기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이후 기독교 문화가 유럽을 지배하게 되면서, 음악이 찬양 하던 신은 신화의 신들에서 기독교의 신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과거의 전통은 잊혔는데, ‘그레고리오 성가’를 오늘날 서양음악의 실질적인 출발점으로 보는 것 은 기독교 중심의 문화로 인한 전통의 단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다 옛 신화들이 예술의 소재로 재등장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르네상스는 눈 에 보이지 않는 신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인간을, 뜬구름 잡는 진리보다는 몸소 겪는 경험과 실제 느끼는 감정, 그리고 실리를 추구하는 ‘인문주의’(humanism)가 힘을 얻은 시기를 의미한다. 이 새 로운 철학사조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곳은 신화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로, 무역이 중요한 산업 이었기에 실리적인 사고가 일찍이 뿌리를 내렸던 것과 관계가 깊다. 인문주의자들은 한 치의 양 보도 없는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면서 현재의 삶에 도움이 되지 못했던 기존 스콜라 철학에 대항 하여 그리스/로마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을 세움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설계했다.
물론 이러한 신화의 복권은 중세 기독교를 대체할 새로운 종교를 세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인문주의적 관점에서의 신화는 오히려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이야기로서 자리했 다. 사랑과 시기, 질투, 탐욕, 거짓, 분노, 파멸 등 인간의 어두운 면을 고루 갖고 있던 신화의 신들, 그들은 신이라고 불렸지만 사실상 인간보다도 억압되어있고 나약하며 감정적이고 잔인한 존재 들이었다. 또한 자연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에도 적합한 이야기들이었다. 즉, 인간과 자연의 모습 을 비춰보는 것이 신화가 복권된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후 문학에서는 신화를 모르면 뉘앙스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시로 인용되었고, 음악에서는 신들의 이야기로 오페라가 탄생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그리스/로마 신화는 비단 유럽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예술적 소재가 될 정도로 일반화되었다.
제피로스, 그 야누스적 이미지
작곡가 김권섭은 신화에서 서풍을 상징화한 신인 제피로스를 소재로 <봄의 전령, 제피로스 >(2018)를 작곡했다. 헤시오도스의 저술에 따르면, 제피로스는 신족인 아스트라이오스와 에오스 사이에 태어났으며, 보레아스(북풍), 노토스(남풍), 에우로스(동풍)의 형제들이 있다. 그리고 그의 아내도 여럿이 언급되는데, 오비디우스의 저술에 따라 꽃의 여신인 플로라로 많이 그려졌다. 제피 로스와 플로라가 ‘봄’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매우 어울렸기 때문이다.
제피로스의 모습은 헤시오도스에 따라 구름을 몰아내고 옷자락을 살짝 건드리는 봄철의 가볍고 따뜻한 서풍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주로 부드러운 모습으로 묘사되어있다. 그림에 서의 제피로스는 날씬한 몸매에 하얗고 고운 피부를 가졌으며, 하늘을 날고 있기도 하다. 봄의 상 징에 걸맞게 작은 나비의 날개를 달고 있어서 이에 어울리도록 몸집이 작게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 플로라보다도 왜소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호메로스는 제피로스가 거센 폭풍을 일으킨다고도 말한다. 이 이야기가 그럴듯한 것이, 그가 마음에 두었던 미소년 히아킨토스가 아폴로의 총애를 받자, 아폴로가 던진 원반에 바람을 불 어 히아킨토스의 머리를 강타해 죽게 한 것이다.(‘히아신스’는 히아킨토스가 죽어서 자란 꽃이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면, 폭풍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 유명 한 보티첼리의 그림에서도 그의 물리적 힘이 느껴지는 낯선 이미지들을 만날 수 있다. ‘봄’에 서는 오른쪽 끝에서 망령처럼 나타나 꽃의 정령 클로리스를 붙잡고, ‘비너스의 탄생’에서는 거대한 독수리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며 클로리스를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꼭 안고 있다.
봄이 오다
오늘 연주될 <봄의 전령, 제피로스>는 봄의 따스한 미풍으로서의 모습과 폭풍도 일으킬 말한 강한 모습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작곡자가 제피로스의 모습으로서 보티첼리의 그림을 참고 했기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이미지를 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대부분의 미술작품들에 서 보기 힘든 제피로스의 ‘위엄’을 그렸다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그런데 이 곡은 헤시오도스나 호메로스가 언급한 제피로스의 이야기를 음악화한 것은 아니 다. 봄이 오는 과정과 그 속에 투영된 제피로스의 모습이 이 곡의 주된 내용으로, 신화를 인문 주의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작곡자 자신이 만든 시나리오에 따라 여러 단편들이 연결되어있 는데, 그 단편들은 순서대로 ‘봄의 태동’, ‘제피로스의 등장’, ‘겨울의 찬바람을 몰아냄’, ‘봄의 소 리(새, 바람 등)’, ‘제피로스’를 상징한다. 이들은 리듬의 분할, 음렬, 다이나믹을 통해 유기적인 연결이 되도록 설계되었으며, 금관악기와 팀파니 등의 여러 타악기로 제피로스의 위엄을 그려낸다. 그 위엄은 우리에게는 생명을 움츠러들게 하는 마지막 꽃샘추위를 몰아내는 거대한 힘 으로 상상해봄직하다.
작곡자는 이 곡을 통해 신화에 관심이 생겼으며, 앞으로 도 신화를 소재로 하여 관현악뿐만 아니라 다양한 편성 의 실내악도 구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펼칠 흥미 로운 시나리오와 새로운 음악에 큰 기대를 걸어본다. 그리고 그리스/로마 신화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의 신화도 그의 주제가 되기를 소망한다. <봄의 전령, 제피로스>는 2018년 3월 18일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에서 김형수가 지휘하는 유벨톤(Jubelton)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었다.